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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보건 선구자 / 이영춘박사 사옥

 

이영춘 박사는 평양고보에 진학해 5년간 교육을 받은 후

교사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였으나

갑작스런 병으로 휴직을 한 후에 독학으로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에 입학

졸업 후 본격적인 의료인으로 태어났답니다.

 

 

 

 

이영춘 가옥

일제 강점기때 구마모토 리헤이가

봄, 가을 등 두세 차례 농장을 방문할 때 임시거처로 사용된 별장 같은 구실을 했던 곳

건축당시 조선 총독부와 비슷한 건축비가 들었을 정도로 초호화 건물이었답니다.

 

해방이후 이영춘 박사가 거주하였기에 이영춘 가옥이라고 부른답니다.

 

 

 

 

쌍춘 이영춘박사의 삶과 일생

 

 

 

 

이영춘 가옥의 외부 모습

 

이영춘 박사는 평생을 농촌의료개선을 위하여 몸을 받쳤던 분이랍니다.

1939년 우리나라 최초로 양호실과 양호교사 제도를 도입하였고

1948년 한국농촌위생연구소를 설립하여 결핵, 매독, 기생충을 3대 민족의 독으로 규정하고

그 퇴치에 앞장을 섰던 분이랍니다.

간호사 양성교육을 하고자 1951년 현재의 군산간호대학을 설립하기도 했으며

평생을 농촌보건에 헌신을 한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고 있답니다.

 

 

 

 

내부로 들어가면 이영춘 박사가 사용하던 물건

그리고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답니다.

 

 

 

 

농민의 성자. 예방의학, 공중보건의 개척자

쌍천 이영춘 박사

 

 

 

 

수 십년이 지난 의자

 

 

 

 

 

 

 

 

 

훈도 임명장

 

 

 

 

1975년 발행된 주민등록증

 

 

 

 

박사님과 평생을 같이해온 서적들

 

 

 

 

 

 

 

 

 

이영춘 박사 자필 이력서

 

 

 

 

이놈이 그놈일세!!!

 

 

 

 

 

 

 

 

 

 

 

이영춘 가옥은 미터법을 사용한 우리나라 최초의 건물로

일제 강점기 때인 1920년대 개인으로서는 조선 최대의 농장주였던 일본인 구마모토의 별장으로 세워진

이 건물은 빙점, 모래시계, 야인시대등 드라마 촬영지로서 많은 사람들의 눈에 익은 곳이기도 합니다.

각 면을 밖으로 돌출시켜 실제보다 크게 보이도록 건물을 설계하였고

각 방향의 디자인을 다르면서도 조화를 이루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외부 형태는 유럽의 형식을 따르며 평면구조는 일식을 바탕으로

양식의 응접실과 한식의 온돌방이 결합된

한식, 양식, 일식의 건축양식의 복합된 모습

침실에는 한식 온돌을 설치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 농장주들에 의한 토지 수탈의 실상을 보여주는 역사적 의미와 함께

해방후 우리나라 농촌 보건 위생의 선구자 쌍천 이영춘 박사가 이용했다는

의료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2003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제 제 200호로 지정된 곳이랍니다.

 

 

 

 

이영춘 박사가 즐겨 썻던 영국신사모

 

 

 

 

마지막 글이 참 마음에 와 닿습니다.

가족에게 번듯한 건물 한 채 남기지 않았지만

대신 농민의 의사로 영원히 기억될 더 큰 재산을 남겼던 쌍천 이영춘박사

 

 

 

 

 

 

 

 

 

외부 벽에 굴뚝처럼 보이는 곳에 이렇게 일본에서 만들었던것 같아 보입니다.

 

 

 

 

흙에 심은 사랑의 인술

쌍천 이영춘박사 추모비

 

 

 

 

외부의 모습

 

 

 

 

군산간호대학교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부르며

한국 농촌보건의 선구자였던 쌍천 이영춘박사

자신의 몸보다 가족들의 富보다는 농민들을 더 챙겼던 이영춘박사

그 가옥을 찾아 잠시 그 업적을 기려보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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