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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근대역사박물관 / 군산여행

 

일제 강점기때 곡창지대의 우리들의 피같은 곡식을 강탈해가지 위해

일본인들이 기거를 하면서 여기저기 그 흔적들이 남아있는 군산

그때의 모습들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군산근대역사박물관

군산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이랍니다.

 

 

 

 

군산역

군산근대역사박물관

1층 해양물류역사관(국제 무역항 군산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어린이 체험관

2층 특별전시관(옥구농민항일항쟁 기념 전시실, 기증자 전시실)

3층 근대생활관(1930년 9월 군산의 거리에서 나를 만나다!), 기획 전시실

 

 

 

 

 

선조27년(1594년) 함경도 병마절도사(현 지역 육군 사령관)에 임명된 교지와

선조 29년(1596년) 용양위 부호군으로 임명한다는 교지

일반적으로 교지의 종이 크기와 두께보다 작고

얇아진 형태의 교지로 전쟁으로 인한 물자부족의 당시 상황을 알 수 있기도 합니다.

 

 

 

 

조운선

 

고려와 조선시대에 백성들에게 거두어들인 세금을

도성으로 운반하는 운송선

본 조운선은 고려시대 이후 군산에 모아진 전북지역의 세곡을

개경과 한양으로 운반하던 물류유통의 항구였던 군산의 역할을

상징하고 제작했다고 안내판에서 전합니다.

 

 

 

 

 

 

 

 

 

근대역사박물관에서 바라본 군산 바다의 모습

 

 

 

 

 

조선의 개항과 변화

조선시대 군산은 전국 최고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의 세곡이 모이는

군산창과 이를 보호하기 위한 군산진이 설치되어

경제, 군사적 요충지로 중시 되었되었답니다.

대한제국은 군산 조계지가 일본에 독점되지 않도록 각국의 공동조계지로 정했으나

개항이후 군산은 일본제국주의의 필요에 종속되어 왜곡된 성장을 겪었다.

 

군산의 성장과 함께 식민지 수탈로 몰락한

충청, 전라, 경상도의 농민과 지식인, 자산가들은 새로운 삶터를 찾아 군산으로 모여 들었다.

이들은 다양한 조직을 만들어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려했을 뿐 아니라

나라를 빼앗기고 차별받는 동포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안내문)

 

 

 

 

공자묘

일제강점기 군산의 유지였던 모리키쿠가 자신의 집 뒷산인

월명산 중턱에 건립한 사당이다.

모리키쿠는 사당과 그 옆에 보국 탑을 건립하여 그의 후손이 영원히

이곳에 살면서 나라에 보국하자는 내용의 탑의 면석에 새겨 넣었다.

이 공자묘 석판은 사당의 현판으로 사용되었다.

 

 

 

 

홍풍행 잡화점

 

 

 

 

생활용품들이 그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네요.

 

 

 

 

눈에 익은 물건들이 제법 보입니다.

 

 

 

 

 

 

 

 

 

토막집(토담집)

토막집이란 일제 강점기 조선인 도시 빈민들이 산등성이에 만든

임시주택을 말한다.

그 모습은 땅을 파고 가마니로 지붕을 만든 형태인데

청동기시대 반지하 주거형태와 비슷하다.

군산의 조선인들은 둔율동, 개복동, 창성동의 산비탈에 토막집 흙집을 짓고

남자는 부둣가에서 막노동을 하고 여자는 일본인 집에서 식모살이와

미선 공으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생활을 하였다고 하네요.

 

곡창지대 곡식을 강탈한 일본인들은 배부르게 먹고 배가 부르니

우리 민족을 괴롭혔겠지요.

 

 

 

 

옛날 생각이 많이 나는 물건들이네요.

 

 

 

 

군산좌 경일좌 합동공연

이곳은 지금 영화관과 다르게 영화와 공연이 이루어졌던 곳으로

민족을 위한 기금 마련하기 위해 많은 공연등이 열렸다고 전해집니다.

 

 

 

 

 

 

 

 

 

군산역

 

 

 

 

군산미곡취인소

일제는 쌀의 가격을 통제하여 쌀 거래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하였고

쌀의 자유로운 거래를 금지하는 한편 거래를 미곡취인소가 독점하도록 하였다.

 

미곡 취인소에서 거래되는 곡식이 보통 쌀과 콩이었기 때문에

미두라는 이름을 붙었는데 미곡취인소를 미두장이라고도 불렀다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곡식을 사고팔면서 생기는 시세 차이를 통해

이익을 얻고자하는 일종의 노름이었다.

군산의 미곡취인소는 1932년에 설립되어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40년까지 존속하였다고 하였다.

 

일제는 우리의 쌀로 얼마나 노름(?)을 하여 부당이익을 했을까 짐작이 가고도 남는답니다.

 

 

 

 

 

 

 

 

 

 

경성고무 형제고무신 방

 

 

 

 

1932년 조선인 이만수에 의해 경성고무공업주식회사가 설립

경성고무는 조선인들의 자본으로 설립된 유일한 공장이었답니다.

경성고무는 해방이후 만월표 고무신을 생산하였는데

그 고무신의 인기는 대단하였다고 전해진답니다.

 

어릴 적 생각이 많이 나는 고무신들이랍니다.

타이어표 고무신, 하얀 고무신 그리고 색깔이 들어간 고무신으로 변해갔던것 같습니다.

 

 

 

 

해방 후 경성고무에서 제작한 만월표 신발

군산의 경성고무는 해방 후 전주와 목포에 분공장을 두고

1,800여명의 직원이 근무하며 년 800만 켤레를 생산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하여 발전을 했지만 1970년 이후 두차례의 화재가 발생해

공장이 전소하는 어려움을 겪으며 쇠퇴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름을 선화로 바꾸고 중국에 진출하여 경성고무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답니다.

전시된 신발은 중국 선화의 사장이 1970년대 군산 경성고무에서 제작하던

신발들을 재현 제작하여 보내준 신발들이랍니다.

 

 

 

 

조선주조 주식회사

 

 

 

 

 

 

 

 

 

군산은 양질의 쌀이 생산되고 소비계층이 두터워서

양조산업이 번성하였다.

1932년 군산에는 9개의 양조장이 있었다고 하는데

조화(해방 후 백화로 상호변경)나 향원주도등은

해방 후에도 유지되었다.

가난한 조선 사람들은 탁주를 음식 대용으로 이용하기도 했기 때문에

양조장의 술지게미로 허기를 달래기 위해

매일 아침 십여 명이 양조장 문 앞에 줄을 서는 모습이

쌀의 도시 군산의 실상이었다.

아픈 우리의 역사입니다.

 

 

 

 

군산역에서 막노동하는 수보랍니다.

 

 

 

 

포수용 마스크

 

3층 기획전시실에서는

역전의 명수 군산야구 기획전이 열리고 있답니다.

한때는 야구의 한 획을 긋기도 했던 곳이 바로 군산이었지요.

2015년 1월 27일 ~ 4월 19일까지

 

 

 

 

 

1930년대 야구공

 

 

 

 

2008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 유니폼

그때 생각이 많이 납니다.

9전 전승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땃던 대한민국이었지요.

목이 터져라 응원했던 기억이 많이 나네요.

그러나 아쉽게도 2012년 런던올림픽과 2016년도 야구는 종목에서 없어졌답니다.

2020년 야구 종목 재진입을 노려보지만 불가능할것이라는게 지배적이라고 하니

아쉽기도 한 야구입니다. 

 

 

 

 

94년 군산상고 유니폼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그때를 기억하시나요?

9회말 2아웃까지 4대1로 지고 있는 경기를 5대4로 역전을 시켜 우승을 했던 군산상고

호남야구 역사상 23년 만에 전국우승을 차지한 역전의 명수였던 군산상고 유니폼이랍니다.

 

 

 

박물관 입장료

성인 군산시민 1,000원  타시군 2,000원

청소년 군산시민 500원  타시군 1,000원

어린이 군산시민 300원  타시군 500원

입장시간 09:00 ~ 18:00(단 동절기 17:00)

통합권(박물관, 진포해양공원, 조선은행, 18은행)을 사면 싸게 돌아볼 수 있답니다.

 

 

군산 !!

일제 강점기때 우리들의 전국최고의 호남평야의 쌀을

강제로 수탈하여 배부르게 먹고 악랄한 짓들을 서슴지 않았던 그시절

아픈 역사의 현장이지만 그때의 군산의 모습의 모습을 보면서

현재 남아있는 근대 건물들을 보면 더욱더 멋진 과거로의 여행길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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