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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동 유적

1907년 우리나라 최초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던 회현리 패총과

금관가야의 생활 유적인 봉화대가 합쳐져

김해 봉황동 유적지로 지정된 곳

금관가야인들의 생활상을 보러 길을 떠나볼까요?

 

 

 

 

가야시대의 대표적인 주거형태인

고상가옥 주거

 

 

 

 

오늘의 봉황동 유적 답사길은

주차장-망루(8) - 패총(13) - 가야주거군(12) - 여의각(11) - 황세바위(9)

기마무사상(4) - 억새마당(7) - 축제광장(15) - 고상가옥(5) - 가야의배*6)

잔디광장(3)으로

 

고고

 

 

 

 

시내중심에서 멀지 않는곳이며 해반천이 옆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곳 이랍니다.

산책하기도 너무 좋은곳이랍니다.

 

 

 

 

높이 약10미터의 망루

외부 침입으로 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높은 망루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회현리 패총

저 건물속에 무엇이 있을까요?

자 ~ 같이 가볼까요?

 

 

 

 

패총의 겉모습인듯 합니다.

 

 

 

 

패총 유물

패총에서는 당시 생활 및 문화활동에 사용했던 토기, 골각패제품, 국제교류를 알 수있는 중국계유물

일본계유물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고

당시의 식생활과 관련한 쌀, 동물뼈, 패각등 다양한 자연유물도 같이 출토되어

당시 생활상을 알 수있는 중요한 근거자료를 제공해주는 곳이기도 합니다.

 

 

 

 

패총(가야시대의 대표적인 조개무덤)

굴껍질 같은 조개무덤이 수m에 걸쳐 쌓여있는곳이기도 합니다.

 

 

 

최초의 발굴은 1907년이었답니다.

 

 

 

 

패총 하부의 유구와 유물

 

 

 

 

고상가옥 주거

가야시대의 건물지등을 참고로 하여

복원한 고상가옥이랍니다.

가야시대의 일반적인 주거형태는

이와같이 반지하식으로 땅을 파고

그위에 벽과 지붕을 얹어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여의각

여의각은 가야시대 출여의 낭자의 정절을 추모하는 서당

출여의 낭자는 아버지와 친구사이인 황정승의 아들 황세와

어릴적 혼인한 사이였다고 합니다.

나이가 들어 황세는 신라군을 물리친 공로로

공주와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출여의는 아버지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황세장군을 그리워하다가 꽃다운 나이 24세때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답니다.

황세장군 또한 출여의의 죽음에 안타까워하고 그리워하다

낭자를 따라 죽었다는 안타까운 전설이 있답니다.

 

 

 

 

 

 

 

 

여의각에서 바라본 김해의 모습입니다.

앞에있는 금관가야의 주거와 현대식 주거들이 비교가 된답니다.

 

 

 

봉황동유적지 나무가 참으로 희한하게 자라

마치 구멍이 뚫린듯한 모양으로

마침 산책나온 한분을 그 구멍 속에 담아봅니다.

 

 

 

 

황세바위

 

황세가 여의에게 오줌 멀리누기 시합을 하자고 제의하자

여의(아버지의 뜻에따라 남장을 하고 다녔음)는 삼대줄기를 사용하여 위기를 넘겼다고 전해지는

그 시합이 있었던 바위가 바로 황세바위랍니다.

 

 

 

 

김해시의 전경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곳 가락국 천제단

 

 

 

 

가락국 천제단과 저멀리 보이는 분성산

 

 

 

수로왕릉역

부산과 김해를 오가는 경전철

경전철 타고 김해여행을 떠나보고 싶어집니다.

 

 

 

 

가을을 흠뻑 느낄수 있는 꽃들도 발걸음을 가볍게 해줍니다.

 

 

 

 

산책하기도 좋은 봉황동 유적지랍니다.

한걸음 한걸음 즐거움이 가득한 곳이지요

 

 

 

 

가야의 기마무사상

기마무사상은 국보275호로 지정된

기마인물형토기와 고분에서 발굴된것들을 토대로

청동주물로 제작한 기마무사상이랍니다.

 

그시대의 군사력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짐작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해반천가의 모습과 경전철

 

 

 

 

축제광장

 

 

 

 

고상가옥

건물 바닥이 지면보다 높게 만들어

주로 곡식이나 제의등 특수물건들을 보관했던 건물이며

해반천변의 입주조건에 맞게 집을 지었던것 같다고 합니다.

 

 

 

 

가옥의 형태는 이곳 지형과 연관이 있는 형태

 

 

 

 

가야의 배

비록 물풀 등에 가려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고대 동아시아의 여러지역과 교역을 많이 했던것으로 전해진답니다.

 

 

 

 

봉황동 유적지 잔디광장

 

이렇게 그 시대의 패총의 모습과

금관가야인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고

또 황세바위의 슬픈 전설이 남아있는 곳

가야인을 만나러 봉황동유적으로 수보와 함께 가보시지 않으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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